진정한 부활
진정한 부활
예수님은 죽은 체 한 것이 아닙니다. 죽은 연기를 한 것도 아닙니다.
실제로 죽었습니다. 무덤에 묻혔습니다.
혹시 여러분은 죽은 적이 있습니까? 저는 두 번 죽었습니다.
한 번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시속 80Km 달리는 트럭에 정면으로 치여 죽었습니다.
놀랍게 20분 만에 깨어났습니다. 깨어나 보니 수십 명의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실려 갔습니다. 그게 다입니다.
또 한 번은 수련회 죽음체험시간에 관에 들어가서 누웠습니다.
스스로 죽었습니다. 네모나고 좁고 차디찬 관짝 안에 들어가서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누웠습니다. 관 뚜껑이 덮이고 못이 ‘탕탕’ 박힙니다.
사람들이 제 이름을 부르며 슬피 웁니다.
칠 흙 같이 어두운 그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숨 쉬는 것을 멈추어 봅니다.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고 몸이 솜털과 같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구름위에 누운 것처럼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무념무상. 모든 생각이 비워집니다. 모든 생각이 사라지고, 감정도 사라지고,
걱정도 염려도, 미움도 증오도 모두 사라집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습니다. 말뿐인가요? 뇌가 멈추므로 생각도 없어지고,
심장이 멈추므로 마음도 없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납니다. 저 뿐만 아니라 관속에 누워 있다가 나온
모든 사람들의 눈이 퉁퉁 부어있습니다.
왜 울까요? 하고 싶은 것을 다 못하고 죽어서?
이루고 싶은 것을 다 못 이루고 죽어서? 그 아쉬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일까요?
아닙니다. 그런 것들을 이루기 위해 희생시켰던 진짜 소중한 것들에게 미안해서
우는 것입니다.
아내를 더 사랑하지 못했고, 자식을 더 사랑하지 못했고, 부모님을 더 사랑하지 못했고,
친구와 이웃을 더 사랑하지 못했음이 후회 되서 우는 것입니다.
죽으면 한줌도 가져가지 못하는 그깟 땅을 위해, 집을 위해, 의복을 위해,
돈을 위해, 지위와 명예를 위해 그렇게 치열하게 경쟁하고 싸우고 다투고
아등바등 거리며 살아온 삶이 너무 어리석고 바보 천치 같은 삶이었음이
깨달아 져서 우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두 헛된 것이 되는데 왜 그런 헛된 것들을 위해 목숨과 시간을 허비하며
다른 사람들의 가슴에 상처와 아픔과 고통만을 남기며 살아왔을까?
이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모든 쓴 뿌리와 엉겅퀴에서 해방됩니다.
모든 저주의 사슬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성경은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다고 말씀 합니다.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한 자의 마음은 혼인집에 있느니라”(전 7:4)
현대인의 성경은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눈 앞에 보이는 즐거움밖에 생각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매일 죽음을 묵상하며 사셨습니다. 사도바울은 날마다 죽는 경험을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삶을 살았습니다.
죽음은 지혜를 선물합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지혜가 없습니다. 깊고 넓은 통찰력이 없습니다.
생각은 좁고 행동은 가벼워서 경거망동합니다.
죽음의 무게가 없으니 생각의 무게도 없고, 행동의 무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안에 계셨던 제일 큰 이유는 성경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죽음을 통해 다 내려놓게 될 때 그 죽음 속에서 찾아지는 것이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을 통해 가장 위대한 교육을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 속에서 음부에 내려가서 심판받고 있는 영혼들을 만나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인사이트가 됩니다.
죽음을 통해 그동안 내가 필요 없다고 여겨서 버려버리고 포기했던 것들 속에
함께 버려졌던 귀하고 소중한 것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계속 무심코 버리고 던져버릴 것들 속에 함께 버려지는 일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땅과 집과 돈과 지위와 명예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
일회용 컵처럼 여기고 쉽게 버리고 던져버렸던 것들,
정직함, 겸손함, 순수함, 신뢰함, 사랑함, 성실함,
이런 진정으로 소중한 것들이 더 이상 함께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덤 속까지 들어가서 죽음 속에 있어야 이 지혜를 얻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에 대해 자주 말합니다.
하늘의 보좌 가장 높은 자리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의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그 낮아지심에 놀라워하며 그 모습을 존경스러워하며 닮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수정할 부분이 있습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사람으로 온 자리까지가 아니라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자리까지입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자리. 거기까지 낮아지신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것보다 더 낮아진 자리,
죽어서 무덤에 묻히는 자리입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죽어있는 자리입니다.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이기에 죽어본 적이 없고, 죽음 속에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까지 낮아지셔서 죽으셨고, 죽음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도 여기까지 닮아야 합니다.
그런데 한 두번 참는 것 까지는 되는데 죽는 것까지 닮지 못합니다.
죽는 것까지 닮지 못하니까 지혜가 없고, 부활도 없습니다.
죽은 척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연기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과 함께 기존의 생각과 마음이 죽어야 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형제 여러분, 내가 확실하게 말합니다.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전사(全死)가 전활(全活) 합니다.”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자만이, 완전한 생을 얻는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내가 ‘이미 죽은 자’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표지판이며 알람시계입니다.
날마다 죽음에 성공하십시오. 그래서 날마다 부활하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부활 입니다.
박선타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