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자유게시판

 

오늘 사는게 지겹다고요?

  • 박선타
  • 2017.05.13 오후 12:35

사는 게 재미없다.
날 밝으면 일어나 배고프면 밥 먹고 하기 싫은 일 억지로 하다가 어두워지면 잠든다.
매일이 똑같다. 지루해 죽겠다. 심심해 돌겠다.
내가 별나 이러는 줄로만 알았는데 대한민국 평균 가장인 우리 아빠 역시 그렇단다.
젊었을 때 놀아도 보고, 예쁜 여자랑 결혼도 해보고, 자식도 셋이나 낳아 길러 보고,
돈도 벌 만큼 벌어 쓸 만큼 써봤으면서도 사는 게 재미없다니.
더 살아봤자 별거 없다는 소리잖아, 맙소사! 아빠의 신세 한탄이 거짓이라면 좋겠다.
하지만 아버지 가라사대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은 귓등으로도 들을 거 없어.
세상에 믿을 거라고는 가족밖에 없는 거여. 아부지는 너한테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어"라고
누차 강조해 오셨으니 "사는 게 재미없다"는 아빠의 말은 아무래도 참에 가까울 것이다.
그래, 인생은 정말 재미없는 것인가 보다.

바람에 낙엽 굴러가는 모습만 봐도 즐거웠던 때가 나에게도 있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한강을 처음 건넜던 날,
도시를 가로지르는 널따란 강물을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광화문 교보문고에 처음 갔던 날,
텔레비전에서만 보던 대형 서점에 왔다는 사실이 너무나 기뻐서 방방 뛰었다.
서울에서 내리는 눈을 처음 맞았던 날,
가로수마다 피어난 노란 불빛에 취해 발이 어는 줄도 모르고 밤늦도록 거리를 걸었다.
양주를 파는 비싼 술집에 처음 갔던 날,
바텐더가 손 위에 올려주는 따뜻한 물수건에 감동해 마음이 다 울컥했다.
처음, 처음, 처음. 어린 나에게는 마주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순간순간이 특별했고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나를 둘러싼 환경에 익숙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이래도 흥, 저래도 흥, 매사에 시큰둥한 사람이 되어 버리고야 만 것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꼴값 떨고 앉았네. 그때가 좋은 줄이나 알어.  

내가 십 년만 젊었어도 아주 그냥 말이야, 어!"  

이 글을 읽으며 혀를 끌끌 찰 어르신들이 계실 줄로 안다.  

하지만 어르신네들, 저도 이런 제가 싫답니다.  

앞길이 구만리 같은데 사는 게 벌써 재미없다니요, 으흐흑!  

남들처럼 밤새워 술 마시고 놀 체력도, 전 재산 탈탈 털어 세계 여행을 떠날 배짱도,  

행복의 나라로 인도해줄 멋진 애인도 없으니 긴긴 여생을 무슨 낙으로 살아가야 하나 싶다.  

그래도 이왕 태어난 거 행복하게까지는 못 살더라도 불행하게 살지는 말아야지.  

어떻게 하면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다가  

오호라, 이거 괜찮네, 한 가지 묘책을 강구해냈다.

지원했던 대학에 모조리 떨어졌던 날,  

좋아 죽고 못 살던 애인이 바람피우는 모습을 목격했던 날,  

직장에서 억울하게 누명 쓰고 사표 냈던 날,  

산에서 실족한 엄마가 피를 철철 흘리며 응급실에 실려 왔던 날을 떠올려 보았다.  

그때의 나는 얼마나 슬피 울었던가.  

신이 나타나 그날들과 오늘 중 하루를 선택해 다시 살아보라고 말한다면,  

나는 당연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오늘을 말할 것이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무료한 하루. 심심해서 몸이 배배 꼬이기는 했지만  

적어도 눈물 흘릴 일은 없었으니 그것만으로도 꽤 괜찮은 날이지 뭐야.  

오늘은 정말 재미없는 하루였다. 이다지도 재미없는 하루를 진심으로 감사한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재미없다면 더는 바랄 것도 없겠다. 

 

 

- 이주윤 작가의 조선일보 연재칼럼 "너희가 솔로를 아느냐" 

 




  • 번호
  • 제목
  • 등록일
  • 작성자
  • 1
  •  오늘 사는게 지겹다고요?
  • 2017-05-13
  • 박선타

게시글 확인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삭제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

게시글 수정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