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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흑사병과 파스퇴르의 업적

  • 이지훈
  • 2016.04.27 오후 03:19

인류의 역사를 바꾼 질병 중에 ‘흑사병(페스트_Pest)’만큼 무섭고 커다란 영향력을 보인 질병도 없을 것이다.

죽은 시체에 검은 반점과 고름이 남기 때문에 ‘흑사병(Black death)’이라고 불렀다.

 

 

 

흑사병의 전파 경로

 

의학계에서는 흑사병의 전파 경로의 기원을 몽골 기마병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1347년 칭기스칸의 장남 주치가 세운 킵차크칸국의 몽골 기마병은

흑해 북쪽에 위치한 제노바의 무역 기지 카파를 포위 공격했다.

 

이때 몽골군은 적군의 사기를 꺾기 위한 수단으로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사병으로 흉측하게 썩은 시신을 모포에 담아 적진을 향해 쏘았다.

하지만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한 결과로 이어졌다.

 

제노바 시에 떨어진 시신에서 흑사병에 감염된 쥐벼룩들은 쥐들로 옮겨갔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벼룩들을 품은 쥐들이 사람들 사이를 무차별로 헤집고 다니며 흑사병을 옮겼다.

흑사병에 감염된 쥐들이 지나갈 때마다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14세기 후반, 제노바의 카파 시에서 창궐한 흑사병은 해상교역로를 따라

서아시아, 이집트, 이탈리아 반도를 거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역사를 바꾼 질병

 

결국 중세 유럽 사람들은 흑사병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1/3이 줄었다.

이때 생존한 노동자, 농민들은 노동인구수의 감소로 흑사병 이후 임금이 두 배로 상승되었다.

 

이러한 노동력 감소는 지배계층의 경제적 부담을 증가시켰다.

그런데 인구수의 급격한 감소는 곡물의 수요 감소로 이어지고,

토지수입에 의존하던 지주들은 높은 임금, 수입하락의 이중고를 겪었다.

 

상업과 교역이 마비되었으며, 숙련공의 격감은 생필품 생산량 감소를 불러왔고,

생필품 공급부족으로 가격이 급등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지주, 농민 모두에게 타격을 주었으며 후에 이 어려움이 지주에서 농민으로 전가되었다.

 

급기야 지주들은 각종 봉건조세와 부과금으로 농민들을 압박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14세기 유럽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발생한 것이다.

 

한편, 흑사병은 교육과 학문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히 대학의 피해가 컸으며 교수와 학생 수가 감소하여 많은 대학이 폐교했다.

이때 시에나대학은 수년간 휴교했고, 옥스퍼드대학과 아비뇽대학은 전면 마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당시 국제어와 교회의 언어로 사용되던 라틴어 사용자들의 수도 감소시켜,

각국은 새롭게 자국의 언어로 성경과 문학작품들을 출간하였다.

이러한 자국 언어의 발달은 국민문학과 국민국가 형성과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

또한 절대권력을 행사하던 교회가 흑사병으로부터 신도들을 구제 못한 것은 교회의 신뢰 추락으로 이어졌다.

이렇게 교회와 봉건영주에 대한 전통과 권위에 대한 신뢰 상실로 중세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세계를 흔든 전염병의 역사

질병은 시공을 초월해 인류의 삶을 끊임없이 간섭해 왔다.  

13세기 한센병 : 중세시대에 확산된 ‘한센병’은 사회적인 통제가 개입된 최초의 질병이다.  

14세기 흑사병 : 중세 유럽을 붕괴시키고 근대시대를 열었다. 

15세기 매독 : 르네상스시대를 맞아 ‘성의 억압’에서 해방되자 ‘매독’이 기승을 부렸다.

특히 전쟁 때 매춘부를 통해 군인들에게 전염된 매독은 전쟁이 끝난 뒤

이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급속하게 퍼졌다.  

18세기 천연두 : 이 병의 치사율은 90%에 달했고, 살아도 실명, 지체부자유, 곰보 등 심각한 후유증을 남겼다.  

19세기 결핵 : 결핵은 ‘백색 페스트’로 불린다.

이 시대의 평균수명이 15세 정도로 추정될 정도로 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죽었다. 

20세기 암 : 오늘날에는 암이 인류를 위협한다.

문명의 발달로 생긴 발암물질에 노출되면서 암이 두려운 질병으로 부상했다

 

 

 

 

 의사보다 더 많은 사람 구한 과학자, 파스퇴르!

역사적 인물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을 뽑는 투표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레옹을 제쳐 놓고 파스퇴르(1822~1895)를 뽑았다. 그들에게는 유럽 전체를 누빈 나폴레옹도 영웅이지만,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 파스퇴르가 더욱 진정한 영웅이었던 것이다.

1880년대 ‘세균 사냥꾼’으로 불리는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와 로베르트 코흐의 등장으로 인류의 전염병과의 싸움은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파스퇴르는 탄저균을, 코흐는 결핵균과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특정 세균이 특정 질환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과학은 종종 우연한 사건으로 발견된다. 당시 유럽은 탄저병과 콜레라가 돌던 시절이었다. 파스퇴르의 실험 보조원은 실험용 닭에게 콜레라균을 주입하는 것을 깜빡 잊고 있다가 며칠 후에 주사했다. 신기하게 닭은 죽지 않았고 오히려 콜레라균에 저항력을 갖게 되었다. 이 현상을 놓고 파스퇴르는 며칠 동안 약해진 균이 닭에게 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오히려 닭이 항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줬다고 추정했다.

그는 우연한 발견을 놓치지 않고 연구해 병균의 독소를 약하게 한 액체를 만들고, 그것을 예방 주사하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바로 백신이다. 후에 광견병 백신도 만들어져 지구에서 광견병에 대한 공포를 완전히 추방시켰다. 그의 나이 62세 때이다.

 

 

 

파스퇴르는 의사가 아니면서 의사보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한 과학자다. 파스퇴르가 사망한 1895년까지 약 2만 명의 환자가 백신 치료를 받았는데, 그 중 사망한 사람은 고작 100명 이하였다. 이후 전염병의 원인과 치료법 연구가 계속 쏟아져 현재 세균은 항생제라는 ‘창’으로, 바이러스는 백신이라는 ‘방패’로 막아내고 있다.

파스퇴르는 프랑스의 화학자이자 세균학자다. 1822년 프랑스 동부의 쥐라산맥에 있는 ‘돌’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무두장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소년시절의 파스퇴르는 우수한 학생은 아니었다. 공부보다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해 장래 미술학과 대학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소년 시절 그는 부모나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 주된 관심사였다. 소년시절에 그린 부모의 파스텔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

그의 학문적 열정이 일깨워진 것은 당시 최고 학교였던 고등사범학교 시절이다. 거기서 당대의 대화학자 뒤마의 강의를 듣고 감격해 화학 연구에 몰두하기에 이른다. 물론 파스퇴르는 화학보다도 미생물학 업적으로 더 유명하지만 그것은 파스퇴르의 미생물학적 업적이 너무 뛰어나서일 뿐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파스퇴르의 첫 연구는 주석산 결정을 분리하는 화학연구다. 그 결과 24살의 젊은 나이에 당시 과학자들이 풀지 못하던 주석산의 정체를 밝혔다. 그리고 1854년 릴대학 교수로 있을 무렵 ‘포도주가 너무 빨리 산성화돼 와인의 맛이 변질되는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한 알코올 제조업자의 부탁을 받고, 발효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된다.

그는 알코올 발효를 일으키는 통과 일으키지 않는 통을 현미경으로 조사해 발효를 일으키는 주체가 효모임을 발견했다. 또 효모와 함께 다른 세균이 사는데 이들이 와인 맛을 변하게 한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이들 세균을 없애기 위해 파스퇴르가 고안한 방법이 유명한 ‘저온 살균법’이다. 60~65℃에서 저온 살균 처리하면 다른 세균이 죽어 맥주나 포도주가 상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는 프랑스의 양조업자들의 위기를 해결해 줬다.

그 때부터 파스퇴르는 미생물학에 몰두했다. 1860년부터 그는 ‘생물은 축축한 진흙에 햇빛이 비칠 때 우연히 발생한다’는 ‘자연 발생설’과 치열한 싸움을 전개했다. 파스퇴르는 미생물은 자연히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 중에 존재하는 미생물이 용액 안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의 학설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다.

이를 증명한 ‘백조 목 플라스크의 실험’은 아주 유명하다. 그는 백조의 목처럼 S자 모양의 길고 가는 곡선의 플라스크를 만들어 그 안에 고깃국을 넣었다. 용액을 끓인 뒤 구부러진 목 부분에 물을 채워 외부로부터 생물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더니 오래돼도 고깃국이 상하지 않았다. ‘자연 발생설’이 잘못된 이론임이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파스퇴르의 인생이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주석산에 관한 최초의 논문을 쓴 1848년에는 어머니가 죽었고, 5명의 딸 중 3명을 잃었다. 소르본대 화학 교수로 재직 중이던 1868년 그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의 고통을 겪게 됐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그는 끝까지 연구에 전념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탄저병 백신 접종 연구는 모두 이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파스퇴르는 애국자로서의 명성도 높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이 전쟁을 시작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기갑부대를 동원해 파리를 포위해 승리하자 양국 간에 휴전 협정이 조인되고, 프랑스는 독일에 배상금을 지불했다. 당시 파스퇴르는 미생물학 업적으로 프로이센의 본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상태였다. 그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다. 그러나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학위를 돌려준다. 그리고 프랑스 맥주가 독일 맥주보다 더 맛있게 하도록 연구에 매진했다고 한다.

프랑스 국민은 조국을 위해 힘을 다한 파스퇴르에게 감사하여 그를 위해 파스퇴르 연구소를 세웠다. 1888년에 세워진 파스퇴르 연구소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미생물 연구소다. 그는 이곳에서 전염병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다가 72세의 일기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글 :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

 

 

동물이나 사람의면역 체계를이용 역으로 세균을 동물에주입시켜 동물의체내에서 생겨나는 항체를이용 완벽한 예방법이나 치료법을 만들었던 백신의아버지 파스퇴르, 그가 훌륭한 이유는 백신으로 특허를 내어 막대한 부(富)를 쌓을수 있음에도 인류를 구원함이 우선이라고 상업화 하는것을 거부 오늘날 극히 저렴한 가격으로 전 인류에게 혜택을 받게한 점이다. 오늘날 예방주사(백신)를 안 맞은 사람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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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6-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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