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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음악성의 방향을 논한다고?

  • 박선타
  • 2021.10.30 오후 12:48

교회 음악성의 방향을 논한다고?

 

최고품질의 믹서와 엠프, 가장 비싼 마이크와 스피커,

현란한 주법의 세션들의 악기 화음이 만들어 내는

미색의 향연가운데 맛보는 귀호강은 충분히 마음을 흔들 수 있다.

본인도 주체할 수 없는 감동과 눈물에 빠져

그 청공의 시간속에 정지된 듯 환각의 여행에 빠져들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은 또 어떤가?

오색찬란을 넘어 신비스러운 운치를 느끼게 만드는 특수조명과

불빛의 반사를 받아 날개를 숨긴 천사처럼 연출되는

싱어들의 미소 가득한 얼굴과 몸짓 앞에서

웬만한 이성의 옷으로 치장된 모든 감성은 무장해제되기 마련이다.

영감인지 느낌인지, 환상인지 환청인지,

성령인지 감정인지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뒤범벅된 반죽 덩어리가 하나님인양, 은혜인양 우리를 속이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의심없이 물과 밀가루가 하나되듯 그렇게 스며들어갈 뿐이다.

누가알까? 인도하는 본인도 모르는 그 미묘한 경계 속에서

누가 이것이 성령이고 저것은 느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김광석의 노래에 흘리던 눈물과

찬송가를 들으며 흐르는 눈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눈동자를 적시고, 위에서 아래로 흐르며, 볼의 굴곡을 따라 흐르는

그 눈물의 성분, 화학기호를 아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과를 가지고 말할까?

붉게 물든 가슴으로 교회의 장의자에 앉아있으면 그것이 경건이고

도로의 가로수 곁을 달려간다면 그것은 타락인가?

성경책을 들고 흘리는 눈물은 거룩하고

문제집을 들고 떨구는 눈물은 속된 것인가?

우리의 마음이 닿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이든, 언제이든

미묘한 먼지바람으로부터 시작하여 태풍이 되고 광풍이 되게하는 음악은

그 자체로 위대하다.

수많은 미사여구와 논리와 합리로 점철된 대학교수의 강연으로 포장되어도

음악은 음악일 뿐이다.

천년 수도원의 동굴소리도, 소년의 손에 들린 스마트폰 소리도

그 소리가 멈추는 순간 모든 느낌도 함께 멈춘다.

이것은 음악의 극적 경험이다.

멈추어 선 순간 모든 느낌도 멈춘다.

그렇기에 거룩과 속됨의 분별을 음악 속에서 찾을 수 없다.

그것은 취향이고 듣는 습관이며 자기주관일 뿐, 아무런 기준도 아니다.

겸손하자. 음악 앞에 겸손하자.

어제의 수술 칼이 오늘의 도둑 칼이 되든,

어제의 강도 칼이 오늘의 수술 칼이 되든 칼은 항상 칼일 뿐이다.

칼 앞에 겸손하자. 나의 기준과 성향과 판단은 털끝만큼도 음악을 바꾸지도,

다르게 할 수도 없으니 그저 흐르게 하라.

모든 세계 위와 모든 움직임 위에서 운행하시는 초월자의 기준은

언제나 모든 것들의 위에서 이루어짐을 잊지 말자.

 

박선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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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음악성의 방향을 논한다고?
  • 202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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